아들을 유혹 시킨 엄마 <메리 앤 조지> 제임스 1세 동성 연인 실화
여기 권력을 갖고 싶고, 궁정에 끼고 싶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메리 빌리어스 Mary Villiers의 야심은 높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죽었고, 남은 재산도 없는 데다 명예도 없는 빈털터리였죠.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아주, 아주 잘생긴 아들 말입니다. 메리 빌리어스는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지만 재산을 긁어 보아 그녀가 내세울 수 있는, 잘생긴 아들 조지를 프랑스 궁정에 유학을 보내죠. 엘리자베스 1세 치하 16세기 시절 영국 상류 사회에서는 프랑스어가 필수적이었고, 조지 빌리어스는 프랑스 궁정에서 어떻게 하면 우아하게 춤을 출수 있는지, 어떻게 유혹할 수 있는지와 유창한 프랑스어를 배워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프랑스 궁정에서 더욱 매력적인 청년으로서 영국으로 돌아온 조지 빌리어스는 1614년 노샘프턴셔의 어느 마을 Apethorpe에서 열린 사냥에서 제임스 1세와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21세의 젊은 조지 빌리어스는 중년의 제임스 1세의 눈을 사로잡았죠.
특히나 당시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받았던 제1대 서머셋 백작, 로버트 카의 적대자들이 그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조지 빌리어스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공격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에 조지 빌리어스는 제임스 1세에게 마실 것을 따라주는 고위 직책인 Royal Cup-bearer에 임명됩니다.
Royal Cup-bearer은 단순히 왕에게 마실 것을 따라주는 하위 직책이 아니라 왕을 향한 독살 음모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직책이었기 때문에 유력한 고위 직책이었습니다. 제임스 1세의 신임을 받을 수 있는 Royal Cup-bearer로 임명된 조지 빌리어스는 프랑스 궁정에서 배워온 예절과 영국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소리도 들은 외모로 재빠르게 영국 궁정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왕과 만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조지 빌리어스는 제임스 1세 후원아래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됩니다. Gentleman of the Bedchamber로서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는 King’s Master of the Horse이 되었죠.
곧이어 자작 작위, 가터 훈장을 수여받은 조지 빌리어스는 1617년 버킹엄 백작 작위까지 받게 되는데 이러한 제임스 1세의 조지 빌리어스를 향한 노골적인 편애는 추밀원의 비판을 낳았고 제임스 1세는 "나, 제임스는 신도, 천사도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난 다른 사람보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당신들은 내가 버킹엄 백작을 누구보다, 여기 모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확실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똑같이 하셨기 때문에 나 스스로 말하길, 그것이 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므로 난 비난받을 수 없고, 그리스도에게는 그의 요한이 있었고, 나에겐 나의 조지가 있다." 라고 스스로를 변호하며 조지 빌리어스에 대한 사랑을 공개적으로 발언합니다.
추밀원의 비판에도 말년의 늙은 왕은 최애 'Favourite' 조지 빌리어스를 '천사의 얼굴'을 갖었다고 알려진 St. Stephen의 이름을 따서 스티니라고 부르면서 애정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페이버릿'이 뭐냐 하면.. 왕의 최측근, 동반자라는 말인데, 조지 빌리어스 같은 경우 제임스 1세의 정부라는 말이랑 똑같습니다. 둘의 관계는 아직까지도 논쟁의 대상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미루어볼 때 제임스 1세의 조지 빌리어스에 대한 총애는 단순히 최측근을 위함이 아니라 그의 동성애인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New Trailer for #MaryandGeorge starring Julianne Moore, Nicholas Galitzine, and Tony Curran. pic.twitter.com/D7TRCX5nvz
— Mary & George Updates (@MaryandGeorgeTV) February 1, 2024
메리 앤 조지 예고편
조지 빌리어스를 향한 제임스 1세의 총애는 빌리어스 가문까지 이어졌고, 아들을 따라 버킹엄 여백작이 된 메리 빌리어스도 궁정에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메리 빌리어스는 제임스 1세와 종종 말을 타며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임스 1세는 "난 빌리어스 가문의 발전을 위해 산다. lived to no other end than to advance the Villiers family" 라고도 했다고 하죠.
제임스 1세의 최애라는 특권은 토지, 재산, 작위를 주었습니다. 왕에게 받은 유산을 지키고 가문을 번영시키려면 조지 빌리어스는 좋은 아내, 자식들이 필요했죠. 메리 빌리어스는 아들을 이용해 빈털터리 신세에서 제임스 1세 후원을 받으며 재산과 작위를 챙겼으니 이젠 아들의 좋은 결혼 상대를 물색했습니다. 야심 찬 메리 빌리어스에게는 평범한 귀족 여성이 아닌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였던 제6대 러틀랜드 백작, 프랜시스 매너스의 외동딸 캐서린 매너스와 아들의 결혼을 주선합니다.
이때 캐서린 매너스와 조지 빌리어스의 결혼은 메리 빌리어스의 속임수로 이뤄졌다라며 전해지는데요. 소문에 따르면 캐서린 매너스를 아들 조지와 같은 지붕아래 하룻밤을 보낼 수 있도록 함정에 빠뜨리면서 귀족 여성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러틀랜드 백작 가문이 어쩔 수없이 빌리어스 가문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했다고 말이죠.
메리 빌리어스의 계략? 캐서린 매너스의 유산은 그녀의 부족한 아름다움을 메꾸는 것 이상이었고, 조지 빌리어스는 젊고, 잘생긴 데다가 왕의 최측근으로 승진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제6대 러틀랜드 백작과 메리 빌리어스는 결혼 협상을 시작합니다.
조지와 캐서린 매너스의 결혼은 복잡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캐서린 매너스는 가톨릭 신자였고, 조지 빌리어스는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또한 제임스 1세는 조지 빌리어스가 개신교 신자와의 결혼만을 허락했죠. 심지어 메리 빌리어스는 엄청난 지참금을 요구하면서 궁정에서 제임스 1세와 미래 사위의 공공연한 애정행각까지 목격한 바 있는 러틀랜드 백작은 터무니없다며 기분이 상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를 놓칠 순 없어! 1620년 3월 메리 빌리어스는 러틀랜드 백작이 없는 틈을 타 러틀랜드 백작부인을 방문해 미래의 며느리와 저녁을 먹겠다 말한 뒤 해가 지기 전 돌려보내겠다 약속하고 캐서린과 함께 빌리어스 가문의 레스터셔 집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메리 빌리어스가 캐서린 매너스와 향한 곳은 레스터셔 집이 아닌 화이트홀의 한 게스트하우스였죠.
그 게스트하우스에는 조지 빌리어스도 있었고.. 메리 빌리어스는 러틀랜드 백작부인에게 딸을 해가 지기 전 돌려보내겠다고 한 약속도 지키지 않은 채 자신의 아들과 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합니다. 캐서린 매너스는 그다음 날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명망 높은 귀족 여성으로서 그녀의 명예는 실추됐어요. 분노한 러틀랜드 백작은 버킹엄 백작과 딸을 결혼시킬 수밖에 없었죠.
1620년 5월 16일 큰 스캔들로 성급하게 결혼하게 된 조지 빌리어스와 캐서린 빌리어스는 러틀랜드 백작과 제임스 1세만 참석한 작은 결혼식을 올립니다.
캐서린 매너스와 결혼 후에도 조지 빌리어스와 제임스 1세의 관계는 더욱더 깊어져갔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조지 빌리어스는 큰 재산을 얻었고, 1623년에는 귀족 계급 중 가장 높고 배타적인 공작 작위까지 수여받았어요. 당시 영국 왕실 일원도 아닌데, 공작 작위를 받은 건 조지 빌리어스가 유일했습니다.
버킹엄 공작의 계속되는 승진은 그의 경쟁자들이 궁정에서 버킹엄 공작을 적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어 같은 해 웨일스 공과 펠리페 3세 딸 인판타 마리아의 결혼을 추진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향하지만 이미 위태로운 결혼 협상에 조지 빌리어스의 어리석은 태도가 협상을 완전히 결렬시키며 버킹엄 공작을 처형시키라는 비난까지 받으면서 궁정 내, 밖에서 그의 인기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50대 후반의 제임스 1세는 점점 더 쇠약해져 갔습니다. 1625년 3월 초 제임스 1세는 말라리아에 걸렸고, 당시 의사들은 왕이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회복되길 기대했죠.
말라리아에 걸린 제임스 1세의 옆은 애인 버킹엄 공작이 지켰습니다. 쇠약한 왕은 호전됐다, 악화됐다를 반복해 갔죠. 공작은 제임스 1세에게 찜질요법을 하며 왕의 주치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cordial이라 알려진 약을 주었고, 이 와중에 죽어가는 제임스 1세의 치료법을 놓고 메리 빌라이스는 의사와 말다툼을 벌였고, 권력에 밀려 주치의는 궁정에 쫓겨나게 됩니다.
주치의를 내쫓자 조지 빌리어스가 왕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합니다. 제임스 1세는 3월 25일 뇌졸중으로 쓰려졌고, 이틀 후 사망합니다. 독살 의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버킹엄 공작은 새로운 왕 치하 아래 지위를 유일한 유일한 궁정인이었습니다. 버킹엄 공작이 제임스 1세를 독살했는지의 사실 여부는 알 수없지만 제임스 1세의 죽음에 버킹엄 공작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 당시에 널리 믿어졌다고 해요.
제임스 1세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찰스 1세의 편애까지 받은 조지 빌리어스이지만 그의 계속되는 외교, 군사 정책 실패는 큰 비난을 받았고, 결국 1628년 8월 23일 존 펠츠라는 한 병사에게 칼에 찔려 사망하게 됩니다. 두 명의 왕의 총애를 받은 조지 빌리어스의 죽음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했죠.
아들의 죽음에 메리 빌리어스는 오랫동안 아들의 죽음을 기다린 것처럼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전해집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각별했던 친구, 버킹엄 공작의 죽음을 애도하며 값비싼 국장을 치르고 왕실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예배당에 매장됩니다. 4년 후 사망한 메리 빌리어스도 아들 옆,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습니다.
벤자민 울리의 논픽션 소설 <The King's Assassin: The Fatal Affair of George Villiers and James I> 을 원작으로 하는 빌리어스 家 모자의 이야기 <Mary & George>가 오는 3월 방영될 예정입니다. 책략가 엄마 메리 빌리어스는 줄리앤 무어가, 제임스 1세를 유혹하는 아들 조지 빌리어스는 니콜라스 갈리친이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