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뤽 고다르 감독 누벨바그 영화 <네 멋대로 해라>로 유명한 진 세버그(Jean Seberg)
미국 뉴웨이브 시네마 시대 대표 배우 중 한 명으로 픽시 컷을 유행시키며 50~60년대 패션 아이콘이기도 한 그녀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불운한 삶을 살다간 배우 중 한 명이예요.
특히 이번에 베니스 국제 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을 받으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진 세버그로 분한 영화 <Seberg>가 발표돼서 한번 알아봤어요.
진보적이고 인권 운동에 관심이 많던 진 세버그는 스타가 되기도 전 1952년,
14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 가입하며 활발히 인권 운동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비롯해 많은 할리우드 셀럽들이 인권운동에 힘썼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50년대에 백인 어린 여자아이가 흑인(유색인종)을 위한 인권운동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고 해요.
1938년생인 진 세버그는 일찍이 19살 나이에 5살 연상인 영화감독 François Moreuil 결혼을 한 상태였는데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첫 번째 결혼생활 도중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는데,
그 남자는 프랑스 문학상 콩쿠르 상 2회 수상에 빛나는 프랑스 출신 소설가 로맹 가리
21세였던 진 세버그와 달리 로맹 가리는 1914년생으로 24살 연상이었지만
둘의 진보적이고 예술적인 면이 잘 맞았는지 각자의 가정을 떠나 1962년 정식으로 결혼을 합니다.
홍할배와 김미니에 비교하고 싶었지만 둘과 비교는 진 세버그/로맹 가리에 너무 모욕인 듯..
행복했던 둘은 그 해 1962년, 알렉상드로 디에고라는 아들도 태어나게 되죠.
하지만 위에 언급했듯이 진 세버그는 진보적인 흑인 인권 활동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특히 60년대 후반부터 흑표당(블랙 팬더)의 수장이었던 일레인 브라운과 많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이로 인해 존 에드거 후버가 이끌던 FBI에 눈총을 받기 시작하며 심한 감시를 당하게 됐다고 해요.
1970년, FBI는 임신 중인 진 세버그에 대해 LA 타임즈를 통해 진 세버그가 임신한
아이의 아빠는 남편인 로맹 가리가 아니라 흑표당 고위인사 중 한 명이다!라고 더러운 언론 플레이를 시작합니다.
이 가짜 뉴스는 몇 달간 계속 보도되며 결국은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고 해요
결국 진 세버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인해 사산하게 됩니다.
태아는 백인 여자 아이였고 니나 하트 가리로 이름을 지어줬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로맹 가리가 후에 말하길 세버그는
아이가 사산됐던 기일이면 연례행사처럼 자살시도를 했다고 하네요..
세버그는 언론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2만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FBI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곧이어 로맹 가리와 이혼한 세버그는 감시가 심했던 할리우드를 떠나
프랑스로 가며 데니스 베리라는 영화감독과 결혼을 해요.
하지만 9년 후인 1979년, 세버그는 갑자기 실종되며,
실종 10일째가 되던 날 경찰은 세버그의 아파트 몇 블락 떨어져 있던 차 뒷좌석에서 자살을 한 채 발견됩니다.
"Forgive me. I can no longer live with my nerves"
이런 불안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없다며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유서가 발견된 채
차의 문이 잠겨져 있지 않았다 등의 그녀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과 친구들은 석연히 않아했고
로맹 가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FBI의 지나친 감시로 인해 세버그가 정신병을 얻게 됐다며 폭로했고
그다음 해 그는 권총으로 자살합니다.
결국 세버그의 장례식 후 FBI가 세버그의 메일을 열어보고 등
전화 녹음, 감시 등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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