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린 당대 최고 여류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

Culture/Features

by lxiawr 2020. 9. 10. 04:18

본문

728x90
반응형

 

 

우리가 대부분 잘 알고 있는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자 프랑스의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우리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올릴 때면 바로 위의 초상화의 모습을 떠올릴 거예요

이 초상화들은 모두 단 한 명의 예술가가 그린 작품이에요

 

 

그 예술가는 바로 후에 당대 최고의 여로 화가로 평가받을 루이즈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

 

 

밀짚모자를 쓴 엘리자베스(자화상)

 

Elisabeth Vigée Le Brun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로 태어나 어린 시절 무용과 음악과 같은 예술 분야를 제외한 즐겁지 않은 교육들은 피하기에 급급했다던 마담 앙투완느

 

 

그 무렵 마담 앙투완느와 1755년생 동갑내기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은 프랑스 파리에서 화가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배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성별 때문에 정식적인 예술 교육은 배울 수 없었죠

 

 

영화 속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

 

 

하지만 재능은 감추지 못하는 법!

 

성별에 관계없이 재능을 꽃피운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은 19세의 나이로 파리 조각가 예술가 협회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 시절 오직 소수 중 소수의 여성 예술가만이 허락된 것이었죠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기에 자신만의 섬세하면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며 인기를 누렸지만 동시에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초상화를 그려준 여러 사람들의 정부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해요

 

 

영상화된 그들의 이야기

 

 

그렇게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은 초상화가로써 명성을 펼치던 중 그를 전 유럽에 알리게 된 것은 동갑내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나고 나서 입니다

 

 

욍비에게 후원을 받기 시작한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은 프랑스 국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외국인 왕비가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이미지의 초상화를 그려나가요

 


모슬린 슈미즈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1783)

 

 


어떠한 장신구도 없이 파란색 큰 깃털이 달린 밀짚모자를 쓴 스물여덟 살의 마리 앙투아네트

위 초상화 속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크와 레이스로 장식된 코르셋 드레스 대신 허리 이음매 없이 일직선으로 내려온 폭이 넓어 속옷과 같은 스타일의 모슬린 슈미즈 드레스를 입었어요

 

지금 입장에서는 왕비 이면의 소박함을 보여준다는 것이 보여지지만, 그 당시에는 프랑스 왕실이 마땅히 보여야 할 베르사유 정원의 부와 화려함을 상징하지 못하고 권위에 맞지 않은 초상화였다고 해요


더욱이나 수입 면직물로 만들어진 하얀색 모슬린 슈미즈 드레스를 입었다는 점.



이때 18세기 유럽의 대부분의 면직물 산업을 주도한 수입산 면직물은 그 당시 프랑스 방직공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이에 프랑스는 통풍이 잘되고 가벼우며 관리가 쉬워 유럽의 귀부인부터 서민들까지 인기를 끈 수입산 면직물의 수입 및 유통을 금지했을 정도였기에 논란을 더했다고 하네요

 

Marie Antoinette with the Rose (1783)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박한 초상 화은 대중들은 격렬한 항의를 받은 후, 바로 위와 같은 초상화로 재빠르게 대체됩니다.


빠르게 대체된 새로운 초상화는 합스부르크 일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베르사유 정원의 연한 빨간색 장미와 함께 두 줄의 진주 목걸이, 청색의 실크로 만들어진 코르셋 드레스를 입으며 

 


프랑스 왕비의 절대적인 부와 우아함, 왕실의 권위를 세워주는 초상화로 다시 탄생합니다. 
그래서인지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구조와 포즈가 거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죠?

 

 

 


Marie Antoinette in Court Dress (1778)

 

 

 

 

 

Marie Antoinette au livre (1785)

 

 

 

 

 

책을 들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1788)

 



이렇게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30개 이상의 마리아 앙투아네트 초상화를 남겼다고 해요


동갑내기 왕비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1783년, 후원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움으로 그렇게 원했던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으로 등록하게 됩니다. 

이 당시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오직 15명의 여성 멤버만 있었다고 하죠

 

 

 


Marie Antoinette with Her Children (1787)

 



왕가의 어머니로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선전 작업으로 의도된 그려진 마리 앙투아네트와 세 자녀들

맨 오른쪽의 왕태자, 루이 요제프가 비어져 있는 요람을 가리키고 있죠?

사실 원래 이 그림은 요람 속에 막내딸 마담 소피도 그려져 있었으나 태어난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해 초상화에서 삭제해야 했다고 하네요



이 초상화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외국인 왕비라는 불안한 정체성을 암시하며 그 당시 프랑스 국민에게 사랑받고 싶어 네 자녀의 엄마로서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죠

 


하지만 이러한 초상화들을 그려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노력은 철저하게 실패해요 ˃̣̣̣̣̣̣︿˂̣̣̣̣̣̣ 

 

 

이 초상화와 관련된 마리 앙투아네트 스캔들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을 뒤흔든 희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마리 앙투아네트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전말​​오랜만에 하는 포스팅은go back to 1785ocalla는 ...

blog.naver.com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족의 초상화를 가까이 두고 보는 것을 좋아하며, 본인의 가문인 합스부르크가 그려진 그림들을 보러 손수 루브르 박물관에 행차하기도 했지만


막상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초상화에는 무관심했다고 해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 중 한 명이었던 마담 캉팡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저 초상화의 유사성에만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네요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외의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 작품

 

 

 


Peace Bringing Back Abundance (1783) 

 

 

 

 


마담 캐서린 그랜드의 초상화 (1783)

 

 

 

 


Baronne de Crussol (1785)

 

 

 

 


Portrait of Muhammad Dervish Khan (1788)

 



인도 남부, 마이소르의 티푸 술탄(Tipu Sultan)이 프랑스 궁정으로 보낸 사절들 한 명인 Muhammad Dervish Khan의 초상화

 


프랑스혁명에도 살아남은 모하메드의 초상화는 2019년 소더비 경매에서 718만 달러에 팔리며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이 로코코 시대 여성으로서 가장 비싼 작품을 그린 예술가로 등극하게 합니다☾⋆⁺₊⋆

 

 

하지만 결국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합니다. 포로 신세로 전락해버린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며 왕비의 사랑을 받는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고향인 파리에 남아있을 시 탄압을 받을 것이라 예상하고 남편을 버리고 딸, 줄리과 함께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도망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 다큐드라마

 


엘리자베스 르 브륑은 파리에서 도망칠 당시 단 몇 푼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요. 비록 프랑스 궁정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로 수백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지만 예술품 딜러였던 망나니 남편이 모조리 다 써버렸다고 훗날에 회고록에 밝혔죠


프랑스 혁명 이후 엘리자베스 르 브륑은 1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향을 떠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러시아로 모습을 숨기며 도망 다녔지만 

 


말 그대로 가는 곳마다의 유럽의 사교계, 왕실 인물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초상화의 가치를 많이 인정받았어요

 

 

 

 

엘리자베스 르 브륑 자화상 (1790)

 

 

 

 


중세에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한 것으로 알려진 쿠메의 시빌라로 분한 넬슨 제독의 정부 엠마 해밀턴 (1792)

 

 

 

 


바커스 신의 여사제(Bacchante)로 분한 엠마 해밀턴 (1790)

 

 

 

 


Anna Ivanovna Baryatinskaya Tolstoy (1796)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10여 년간 다른 유럽 나라로 도망쳐 작품 활동을 한 엘리자베스 르 브륑은 가족들과 남편의 노력으로 1800년 프랑스 시민권을 회복해요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나폴레옹 집권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유럽을 떠돌다 몇 년 후 파리로 돌아와 1842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들과 국보로 내려올 정도로 유럽의 역사적인 인물들의 초상화들을 남긴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들은 20세기 후반까지 그의 유산은 철저하게 무시당해요

전시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 조각

 

 

전 단두대에서 처형을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랑을 받아서 일까요?

아님 그저 여성이었던 예술가이기 때문일까요?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의 사망 이후 평가절하된 그의 작품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주목받기 시작하며 80년대 주디 시카고가 이끈 여성 예술가 되찾기 운동과 함께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륑은 다시 실력과 가치를 인정받으며 로코코 시대 최고의 여류 작가로 가치 받고 있습니다.

 

 

 

이 포스팅은 안토니아 프레이저의 마리 앙투아네트 책을 참고 및 발췌했습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