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중문화예술의 상징이자 디즈니의 창립자 월트 디즈니는 1966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후 발견하길, 월트 디즈니의 책상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쓴 메모가 남겨져 있었는데 그 메모에는 커트 러셀(Kirt Russell)이라는 이름만이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커트 러셀은 그 당시 10대 아역배우로 활동했던 배우로 이후 50여 년이 흘러 마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에 출연한다.
톰 크루즈, 그도 신인일 때가 있었고 80년대 초반만 해도 할리우드 황금기를 보낸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닮은 모습에 제2의 몽고메리 클리프트라고 불린 적도 있었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수줍은 성격과 섬세하게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지만 50년대 차사고로 인해 왼쪽 얼굴이 다치면서 시도한 성형수술이 원래 그의 외모를 망가트렸다 생각해 사고 이후 배우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망가진 자신의 얼굴에 비관한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죽을 때까지 십여 년간 그의 뉴욕 아파트에서 머물면서 여러 중독 문제에 시달렸는데 1966년, 그가 알코올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한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연기 코치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죽음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긴 자살이라고 평했다.
위에서 언급한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차 사고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참석했던 파티장 밖에서 발생했는데 차 사고 소리가 나자마자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에게 달려갔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가 목구멍에 막혀 죽어가는 그의 목구멍에 재빠르게 손을 넣어 이를 빼내 목숨을 구했다한다.
이후 피투성이가 된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병원 응급실로 향했고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찍기 위해 안달 나 병원 밖에 대기하고 있던 파파라치들을 향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피가 묻은 몽고메리의 사진을 찍는다면 당신들은 앞으로 절대 내 사진 못 찍을 줄 알아! 라고 경고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만 할 수 있었던 협박으로 지금까지 피투성이가 된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사진은 볼 수 없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아주 절친했던 사이로 염문설이 돌기도 했는데 사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동성애자였다. 지금도 남자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면 캐스팅부터 안 되는 판에 50년대 그 당시에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죽을 때까지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더욱이나 그는 굉장히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몽고메리 클리프트, 도로시 파커, 트루먼 카포티, 탈룰라 뱅크헤드가 뉴욕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던 중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술에 취해 먼저 곯아떨어졌고, 그런 그를 본 도로시 파커는 취한 몽고메리 클리프트 앞에서 "정말 잘생겼어... 섬세하고, 정교하게 생긴 미남이지.. 내가 본 남자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생겼어.... 근데 불쌍하기도 해라 좆빠는놈이라는 게"
Cocksucker라는 굉장한 모욕적인 단어 선택에 놀란 일행들은 도로시 파커를 쳐다봤지만 도로시 파커는 "왜? 맞잖아 컥써커 아냐?" 이에 탈룰라 뱅크헤드는 "다알링... 내가 어떻게 알겠어?... 쟨 내 좆 빨아준 적 없는걸" 이라 반응했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다고 평을 받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미의 대명사로 상징되는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했다. 당시 영화 클레오파트라를 출연하는 조건으로 받은 출연료는 7백만 달러, 이것을 현재 한화로 계산해보면 600억 원이 훨씬 넘는다. 지금만 따져도 출연료 2천만 달러를 받는 여자 배우는 다섯 손가락에 꼽는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출연료를 받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누군가 나와 영화 한 편을 찍기 위해 100만 달러를 줄 정도로 멍청하다면 난 확실히 그걸 거절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영화는 망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두 줄 속눈썹(Deistichiasis)이라는 희귀병을 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희귀병은 그를 더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같은 시대의 배우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르게 노화가 진행됐는데 이건 낙마사고, 폐렴 등으로 인해 젊을 때부터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 말 그대로 죽을뻔한 고비를 몇몇이고 넘겼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2011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실제로 20대, 30대 총 두번 말그대로 사망선고를 받은 바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61년, 심각한 폐렴으로 인해 기관절개술을 하며 목에 세로로 긴 상처를 갖게 된다. 당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버터필트 8>라는 영화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상태였는데, 시상식 불과 몇일 전 수술 및 퇴원을 한다.
솔직히 그저그런 수준의 영화에 불구했던 영화에, 딱히 뛰어나지 않았던 연기로 수상에 멀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동정표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다. 이에 유력한 수상후보였던 셜리 매클레인은 "난 그 수술(Tracheotomy)에 졌다" 란 말을 남겼다.
데뷔 3년 만에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그레이스 켈리는 유럽의 작디작은 공국 모나코의 레니에 3세와 만나 할리우드 프린세스에서 진짜 프린세스가 된다. 할리우드 프린세스 출신이라도 당시 유럽에서는 여전히 여자 쪽이 시집갈 때 시댁에게 지불해야 하는 지참금 제도가 남아있었고, 그레이스 켈리는 2백만 달러를 준비해 갔다.
이러한 지참금 제도에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레이스 켈리 부친은 내 딸은 결혼하기 위해 남자에게 돈을 낼 필요 없어! 라며 불같이 화를 냈는데 결국엔 딸을 위해 승복하고 그레이스 켈리가 받을 유산 몫을 떼어 지참금을 마련했다.
그레이스 켈리 삼촌 조지 켈리는 연극 <Craig's Wife> 각본가로 1925년 퓰리쳐 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수상 후 그의 커리어는 급격하게 하향세를 탔는데 그 이유는 조지 켈리가 여성 혐오자, 반유대주의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성애자라고 비난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클로짓 게이였던 조지 켈리는 게이라서 가족에게 손절당했다.
그레이스 켈리의 유일한 오빠인 존 B. 켈리 주니어는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조정선수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으며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렸는데 어느날, 바람둥이였던 미스터 켈리는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버리고 트랜스젠더 여성 스트리퍼 Rachel Harlow와 불륜을 저지르며 이혼했다.
당시 필라델피아 시장으로 출마했던 존 켈리 주니어는 트렌스젠더와 불륜 스캔들에 당선에 실패했다. 가족들은 당연히 Golden boy 아들이 트랜스젠더와 사귄다는 사실에 충격받았는데 특히나 모친은 그를 '고치려고' 노력했고 아들은 절망했다.
그레이스 켈리의 부모는 사회적으로 성공했긴 했지만 모친은 자녀들에게 신체적으로 굉장히 폭력적이었고 부친은 배우가 되려는 딸을 전혀 진지하게 보지 않았다. 더욱이나 그레이스 켈리는 중간에 낀 아이로 비교적 관심을 받지 못하며 자라며 그 애정을 자기 나이보다 훨씬 연상의 남자들로부터 채웠다.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4번 수상하며 독보적 기록을 갖고 있는 캐서린 헵번은 자신의 수상 기록에 바로 뒤를 잇고 있는 메릴 스트립의 연기를 굉장히 혹평하였다. 너무 계산적이고 기술에 의존한다는 이유였는데 메릴 스트립에게 한 평과 반대로 줄리아 로버츠의 연기는 칭찬하였다.
하지만 캐서린 헵번과 더불어 대배우로 평가받는 베티 데이비스는 메릴 스트립의 연기를 극찬하며 메릴 스트립의 초반 커리어에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캐서린 헵번은 12번의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 선정, 4번의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오스카 시상식에는 상을 받으러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한번 시상식에 참석하긴 하지만 이건 기념상을 수여하기 위함이었다.
캐서린 헵번이 오스카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내가 아니면 누구타? 이러한 생각이라서 라고 많이 알려져있지만 70년대 후반, TV 인터뷰에서 밝히길 "난 왜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을까? 수상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나? 나도 내가 불참하는게 옳다고 생각하진 않아. 2류같은 하찮은 행동이지" 라 답변했다. 후에 캐서린 헵번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한번 더 수상한다. 물론 참석하진 않았다.
캐서린 헵번은 평소에나 영화 속에서나 치마 대신 바지를 입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제작사가 여자는 치마나 입으라며 그의 바지를 모두 숨겨버리자 이에 캐서린 헵번은 보복으로 제작사가 바지를 내놓을 때까지 속옷 바람으로 촬영장을 돌아다녔다.
캐서린 헵번은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2번 수상에 빛나는 스펜서 트레이시와의 러브 스토리로도 유명하다. 둘은 할리우드 커플답지 않게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스펜서 트레이시는 이미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스펜서 트레이시는 종교 때문에 이혼을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둘의 관계는 비밀에 부쳐지기는 하였으나 말 그대로 모두가 인정하던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펜서 트레이시의 아내는 30여 년간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굳건히 믿었고, 캐서린 헵번과의 관계를 그저 '루머'로만 치부했다.
이에 루머가 된 캐서린 헵번은 인터뷰 도중 스펜서 트레이시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격노했다. 그러나 스펜서 트레이시가 죽을 때까지 법적인 아내 대신 병시중을 한 캐서린 헵번은 그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음으로 가족들에게 존중의 의미를 보냈다.
말론 브란도는 전설적인 연기 실력과 함께 아무 하고나 자고 다니는 전설적인 스킬... 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관계 중 한 명은 제임스 딘
전문 회고록 작가 다윈 포터에 따르면 말론 브란도와 제임스 딘의 관계는 철저하게 말론 브란도가 갑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제임스 딘은 말론 브란도의 사랑을 열정적으로 갈구했다 한다.
말론 브란도의 문란한 생활은 할 말 다했던 그 유명한 퀸시 존스의 인터뷰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퀸시 존스는 말론 브란도는 아무나하고 자고 다녔다며 마빈 게이, 제임스 볼드윈, 리처드 프라이어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폭로했다.
남미 출신의 아버지를 두어 비교적 어두운 피부를 갖고 있던 히스패닉 혈통의 마가리타 카시노라는 한 소녀는 열렬히도 배우가 되는 것을 꿈꾸었고, 이에 제작사는 그녀를 백인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피부를 표백시키고, 전기 분해 요법으로 헤어라인 성형, 머리카락을 빨갛게 염색하게 강요했다.
이러한 수많은 성형으로 아예 인종이 바뀌어버린 마가리타 카시노는 리타 헤이워드라는 이름으로 데뷔하며 40년대 섹스 심벌이 된다.
영원한 스타워즈 프린세스 레아, 캐리 피셔는 50년대 스타 데비 레이놀즈와 에디 피셔의 딸로 전형적인 할리우드 금수저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에디 피셔는 아내 친구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불륜을 저지르며 데비 레이놀즈와 딸을 두고 떠났고, 더욱이나 데비 레이놀즈와 캐리 피셔는 배우로서의 경쟁심 등으로 인해 사이가 복잡했다. 이러한 결과로 캐리 피셔는 13살 때부터 마약을 하기 시작해 점점 약물에 의존했고 결국 데비 레이놀즈는 딸이 각성제(LSD)를 너무 많이 섭취하는 것 같아 걱정이 돼 도움을 요청했다.
보통은 의사에게 전화를 하겠지만 배우 엄마는 배우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캐리 그랜트에게
물론 그만한 이유도 있었던 게 캐리 그랜트는 50년대부터 LSD가 심리 치료제의 일종으로 효과가 탁월하다며 엄청난 홍보를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또한 데비 레이놀즈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던 날 캐리 피셔가 전화를 받지 않자 딸이 마약 중독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 된 배우 엄마는 의사에게.... 가 아닌 배우 에바 가드너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캐리 피셔는 자서전에 쓰길 배우인 엄마는 배우 딸의 문제에 대해 배우인 동료에게 의사 노릇을 하라는 요구가 지극히도 정상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녀로써 사이가 매우 가까웠던 캐리 피셔와 데비 레이놀즈는 2016년, 단 하루 차이로 세상을 떠났다.
둘의 관계는 캐리 피셔가 각본을 쓴 영화 <Postcards From The Edge>에 잘 드러나있다. 본인에게 영감을 받은 캐릭터는 친구 메릴 스트립이, 엄마 역은 셜리 매클레인이 연기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60년대에는 더욱 할리우드에서 나이 든 '여'배우들은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 중년이 넘는 나이였던 대배우 베티 데이비스와 조안 크로포드도 또한 젊을 때의 영광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60년대 초반 둘은 같이 공동 주연을 캐스팅된 영화 <제인의 말로(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에서 그야말로 전설적인 연기를 남긴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동안 둘의 경쟁심으로 인해 불화는 멈출 줄 몰랐고 그 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은 미친 연기를 보인 베티 데이비스가 받는 것이 확실시됐으나 조안 크로포드의 방해공작으로 베티 데이비스는 수상에 실패한다. (베티 데이비스는 이미 2개의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가지고 있었다.)
베티 데이비스는 조안 크로포드의 이러한 방해공작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고, 이후 시간이 흘러 70년대 후반, 조안 크로포드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둘의 불화는 끊어졌다. 앙숙의 사망 소식을 들은 말년의 베티 데이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죽은 이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면 절대 안 되는 법...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말... 은 조안 크로포드가 죽었다는 거야, 아주 좋아"
하지만 우습게도 베티 데이비스와 조안 크로포드 모두 자신의 딸들에게 엄마로부터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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