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아내 마사 워싱턴(Martha Washington 1731-1802)
-버지니아주 농장주 집안에서 자란 18살 마사는 자신보다 20살 연상 노총각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Daniel Parke Custis)와 결혼해 4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모두 성인이 되기 전 병에 걸려 사망했다.
-첫 번째 남편이 죽은 후 마사는 남편의 17,500 에이커의 땅, 300명의 노예를 상속받아 굉장히 부유한 과부가 되었다.
-첫 번째 남편이 죽은 2년 후 1759년 연하 조지 워싱턴과 그녀의 고향 New Kent County에 있는 White House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마사 워싱턴은 남편의 대통령 출마를 반기지 않았고,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첫 번째 First Lady라 불리나 당시에는 대통령의 아내를 퍼스트레이디라 부르지 않았기에 보통 Mrs. Washington 또는 Mrs. President라 불렸다.
-조지 워싱턴의 유언에 따르면 그의 123명의 노예들은 아내의 사망 후 노예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을 것이라 약속받았다. 자신이 먼저 죽으면 노예들이 아내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는데, 조지 워싱턴이 1801년 먼저 죽자 마사를 걱정한 친척들의 권유로 남은 노예들에게 모두 자유를 되찾아주었다.
미국 초대 부통령/제2대 대통령 존 아담스의 아내 아비게일 아담스(Abigail Adams 1744-1818)
-1776년 남편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대륙회의에 참가했을 때 아비게일 아담스는 새로운 법률을 작성할 수도 있는 남편에게 "여성들을 기억하라(Remember The Ladies)" "무한한 권력을 남편들의 손에 쥐어주지 마라.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남자들이 폭군이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Do not put such unlimited power into the hands of the husbands. Remember all men would be tyrants if they could.)" 라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편지를 농담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존 아담스는 정치와 다른 문제들에 대해 아내에게 많은 의견을 구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아비게일에게 "나는 내 인생에서 당신의 조언과 도움이 더 간절한 적이 없었다..." 라는 편지를 보냈다.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모친이기도 한 아비게일이지만 남편과 달리 아들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은 보지 못한 채 사망했다.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아내 마사 웨일스 스켈튼 제퍼슨(Martha Wayles Skelton Jefferson 1748-1782)
-마사 제퍼슨은 출산 후유증으로 아이를 낳고 몇 달 후 사망했다. 19년 후 남편은 제3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며 재혼하지 않았고, 대통령 때 백악관의 호스티스 역할은 딸이나 국무장관의 아내 돌리 메디슨에게 맡겨졌다.
제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아내 도로시 페인 토드 매디슨(Dolley Madison 1768-1849)
-1814년 영국군이 워싱턴을 공격해 불이 나자 백악관을 탈출했어야 했는데 그런 위험한 순간에도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를 불길에서 보존해냈다는 일화가 전쟁 후 알려지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림을 구해낸 건 그의 노예들이었다.
-돌리 매디슨의 여동생은 최초로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제임스 메디슨과 가족들은 버지니아주에 있는 농장을 운영했으나 돌리 매디슨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의 재정 관리 실패 등으로 궁핍하게 살았고, 남편이 죽자 돌리는 재산, 가구 등을 팔며 살아야 했다.
-First Lady라 불리는 첫 번째 대통령의 아내였다. 1849년 그의 장례식에서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가 추도문에서 First Lady로 지칭한 것이 굳혀져 대통령의 아내를 퍼스트레이디라 부르게 되었다.
제5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 아내 엘리자베스 코트라이트 먼로(Elizabeth Kortright Monroe 1768-1830)
-남편이 프랑스 주재 외무부 장관이었던 1790년대 파리에서 거주했던 부부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미국을 도왔던 프랑스 후작의 아내 라파예트 후작 부인(Marie Adrienne Françoise de Noailles)을 프랑스 혁명에서 구해냈다.
-후작 부인을 석방시키게 도와준 엘라자베스 먼로의 대담한 행보에 감명받은 프랑스 언론은 그녀를 아름다운 미국인(la belle Américaine)이라며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막상 영부인이 된 엘리자베스 먼로는 냉담한 성격으로 미국에선 인기를 끌지 못했다.
제6대 미국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아내 루이자 존스 애덤스(Louisa Johnson Adams 1775-1852)
-영국에서 태어난 루이자는 21세기 이전 유일하게 미국 밖에서 태어난 영부인이었다.
-대통령 부부의 세 아들들은 모두 같은 한 여성과 교재 했는데, 그녀에게 선택받은 존 애덤스 2세는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머지 두 아들들은 형제의 백악관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거부하였다.
제7대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의 아내 레이첼 잭슨(Rachel Jackon, 1829–1837)
-레이첼은 가정폭력 하는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1791년 두 번째 남편 앤드류 잭슨과 재혼했다. 다만 첫 번째 남편은 이혼소송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둘을 간통과 중혼 혐의를 제기했다. 혐의가 제기된 후 1794년 잭슨 부부는 서로와 다시 재혼해 분쟁을 끝냈다.
-당시 남편과 사별이 아닌 이혼을 한 여성은 극도로 드물었고, 그녀의 이혼은 연임에 실패한 존 퀸시 애덤스 지지자들에 의해 워싱턴에서 가십거리로 소비되었다. 이러한 비난에 레이첼 잭슨은 백악관에서 사느니 하느님 집에서 문지기로 사는 게 낫겠다는 말을 남겼는데 결국 남편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3개월도 남지 않아 사망했다.
제8대 대통령 마틴 반 뷰런 아내 한나 반 뷰런(Hannah Van Buren 1783-1819)
-네덜란드 계인 마틴 반 뷰런과 한나는 매우 가까운 사촌 관계이다.
-다섯 아들을 낳은 한나 반 뷰런은 1819년 결핵으로 사망했고, 아내를 대중에 공개해 쑥스럽게 만들지 않겠다며 자신의 자서전에서 조차 아내의 이름을 넣지 않는 남편은 아내의 죽음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아들 에이브라함은 돌리 매디슨의 친척 안젤리카 싱글턴과 결혼해 부재한 영부인 대신 백악관의 호스티스 역할을 맡았다.
제9대 미국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아내 애나 해리슨(Anna Tuthill Symmes Harrison 1775-1864)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 태어난 마지막 퍼스트레이디
-남편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백악관으로 들어가지 못한 유일한 영부인이다.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도 대통령 취임식 때 비를 맞은 것을 이유로 감기에 걸려 재임 31일 만에 사망했다.
제10대 대통령 존 타일러 아내 레티티아 크리스챤 타일러(Letitia Tayler 1790-1842)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갑자기 사망해 부통령이던 존 타일러가 대통령 직을 승계받았다.
-8명의 아이를 낳은 레티티아 타일러는 남편이 부통령인 시절 뇌졸중을 일으켜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 백악관에서 사망했다.
줄리아 타일러(Julia Tayler 1820-1889)
- 존 타일러는 2년 후 '롱아일랜드의 장미' 로 불린 30살 연하의 줄리아 가디너와 재혼했다. 그들의 엄청난 나이차는 비판을 받았다.
-둘은 7명의 자식을 낳았고, 존 타일러는 첫 번째 결혼에 낳은 자식들을 다 합해 총 15명의 아이를 두었다.
-1870년 링컨 대통령의 암살로 과부가 된 메리 토드 링컨에게 의회는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을 선례로 대통령의 과부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남편이 죽은 후에도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제11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폴크 아내 사라 폴크(Sarah Polk 1803-1891)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던 그는 백악관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일요일에 춤추는 것과 음악을 트는 것을 금지했다.
제12대 미국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아내 마가렛 테일러(Margaret Taylor 1788-852)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한 마가렛 테일러의 행보는 근거 없는 루머를 만들어냈다. 한 루머에는 그녀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시골 여자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손자는 할머니가 한치의 매너 위반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해명했다.
-남편이 콜레라로 사망하자 더욱더 은둔했으며 생전 초상화도 하나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사후 그의 사진 한 장이 발견됐다.
제13대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 아내 아비게일 파워스 필모어(Abigail Powers Fillmore 1798-1853)
-교사 아비게일 파워스는 남편이 제자였을 때 처음 만나 1826년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직업을 가진 최초의 영부인이다.
-남편과 함께 눈이 휘몰아친 남편 후임자 취임식에 참석하는 바람에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
제14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 아내 제인 피어스(Jane Means Appleton Pierce 1806-1863)
-정치를 혐오했던 제인 피어스는 남편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단념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제인 피어스는 두 아들이 죽은 것이 정치 때문이라 여겨 워싱턴에 가는 것조차 싫어해 프랭클린 피어스는 상원의원에서 은퇴한 바 있다.
-1852년 남편이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는 소식에 충격으로 쓰러진 제인은 유일하게 남은 아들 벤자민에게 자신은 워싱턴으로 가고 싶지 않기에 남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다.
-프랭클린 피어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피어스 가족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기차가 탈선해 아들 벤자민이 눈앞에서 죽었다. 유일한 아들의 죽음 2달 후 열린 대통령 취임식은 축하보단 애도의 분위기로 취임식 무도회도 열리지 않았고, 영부인도 참석하지 않았다.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 조카 해리엇 레인 (Harriet Lane Johnston 1830-1903)
-제임스 뷰캐넌은 결혼하지 않았기에 피후견인 조카 해리엇 레인이 아내 대신 영부인 자리를 대신했다.
-20대의 젊은 퍼스트레이디는 패션, 예술에 관심이 많아 굉장한 인기를 얻었고 최초의 현대적인 퍼스트레이디로 표현된다.
-제임스 뷰캐넌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펜실베이니아주, Wheatland에 정착한 해리엇 레인에게 많은 구혼자들이 있었으나 삼촌은 성급히 결혼을 하지 말라 주의를 줘 36세의 늦은 나이에 은행가와 결혼했다.
-1903년 사망 후 유언으로 그의 상당한 규모의 미술품 컬렉션은 정부에 기증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며 해리엇 레인은 국립 미술 컬렉션의 퍼스트레이디(First Lady of the National Collection of Fine Arts)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존스 홉킨스 병원의 병든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며 존스 홉킨스가 뛰어난 소아과 시설을 갖추는데 공을 세웠다. 현재도 The Johns Hopkins Hospital :Harriet Lane Clinic는 운영되고 있다.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아내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 1818-1882)
-남부 출신인 메리 토드 링컨은 그녀의 친척들이 남부연맹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과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지출은 남편을 괴롭히는 악독한 퍼스트레이디라는 악명을 떨치게 했다.
-최초로 암살된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으로써 1870년 의회는 메리 토드 링컨에서 연간 3,000달러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금액이 불충분하다 생각해 자신이 가난하다는 왜곡된 생각에 시달렸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로버트 토드 링컨은 1875년 모친을 정신이상이라 몰아 개인 요양원에 감금시켰으나 미국 최초 여성 변호사 Myra Bradwell가 도와줘 풀려날 수 있었다.
제17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 아내 엘리자 존슨(Eliza McCardle Johnson 1810-1876)
-남편의 정치적 야망을 격려하였으나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을 선호했다.
제18대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아내 줄리아 덴트 그랜트(Julia Dent Grant 1826-1902)
-가난한 중위였던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본인 스스로도 말하길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색한 방식으로 줄리아 덴트에게 청혼하나 전형적인 남부 노예 소유 농장주 집안의 부친은 그랜트가 너무 가난하다며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줄리아는 분노하며 나도 가난하다며 소리치며 결국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멕시코 전쟁에 참전한 뒤 결혼했다.
-1877년 8년간 있던 대통령에서 물러난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아내와 함께 세계질주를 시작했으나 미국으로 돌아온 말년에는 사업실패로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이에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암에 걸려 위독했을 때도 자서전을 집필했다.
-남편이 암으로 사망하고 뉴욕시 남편의 기념비 봉헌식에 참석한 줄리아 그랜트는 "그의 영광스러운 명성의 빛은 여전히 나에게 닿아있고, 나에게 떨어지며, 나를 따뜻하게 한다." 라는 말을 남겼다.
제19대 미국 대통령 러더퍼드 B. 헤이스 아내 루시 웨어 웹 헤이스(Lucy Ware Webb Hayes 1831-1889)
-최초로 대학 교육까지 받은 퍼스트레이디
-완고한 금주 운동 활동가로 임기 간 백악관에서 술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모네이드 루시'라 불리며 아주 인기 있는 영부인이었다고 한다.
제20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 아내 루크레티아 가필드(Lucretia Garfield 1832-1918)
-남편의 선거 캠페인을 위한 사진 촬영을 단호하게 거절할 정도로 내성적이고 자족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백악관에 들어온 뒤 말라리아와 신경쇠약에 시달려 남편이 총을 맞았을 때도 뉴저지의 해변 휴양지에서 건강을 회복 중이었다.
-루크레티아 가필드는 백악관으로 돌아와 총을 맞은 남편을 간호했고 두 달 뒤 남편이 죽자 고향 오하이오로 돌아갔다.
제21대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의 아내 엘렌 아서(Ellen Lewis Herndon Arthur 1837-1880)
-워싱턴 D.C. 에 위치한 해군 천문대 설립자 중 한 명인 해군 장교 윌리엄 루이스 헤든의 딸로 1859년 체스터 A. 아서와 결혼했다.
-남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1년 전 폐렴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의 영부인 역할은 체스터 A. 아서의 여동생 메리가 대신 수행했다.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지 않은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매일 아내 엘런의 초상화에 신선한 꽃을 둔 것으로 유명하다.
제22·24대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브랜드 아내 프랜시스 클라라 폴솜(Frances Cleveland 1864-1947)
-1884년 대통령 선거 승리 후 사생아를 버렸다는 스캔들가 폭로된 글로버 클리브랜드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27살 연하 프랜시스 클라라 폴솜에게 청혼했다.
-글로버 클리브랜드는 최초로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대통령이며 그보다 훨씬 어렸던 21살의 프랜시스는 지금까지 최연소 퍼스트레이디이다.
-아름다운 외모로 인기를 얻었던 영부인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로버 클리브랜드가 너무 싫은 나머지 아내조차 못생겨 보인다는 말을 했다곤 한다.
제23 대 미국 대통령 벤자민 해리슨 아내 캐롤라인 라비니아 스콧 해리슨(Caroline Lavinia Scott Harrison 1832-1892)
-미국 혁명 여성회(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설립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초대 회장을 지냈다. 또한 존스 홉킨스 대학이 최초로 여성 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왔다.
-캐롤라인 해리슨은 백악관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며 백악관 식기류들을 전시하려 했으나 전시가 완성되기 전 폐렴으로 사망했다.
-벤자민 해리슨은 아내 죽음 14년 후 25살 연하 캐롤라인의 조카인 메리와 재혼했다.
제25대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아내 아이다 삭스턴 매킨리(Ida Saxton McKinley 1847-1907)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아이다 삭스턴은 유럽을 여행하며 부친의 은행에서 출납원으로 일할 때 변호사 윌리엄 매킨리를 만나 결혼했다.
-아이다의 모친이 사망하고 두 딸도 사망하자 아이다 매킨리는 정맥염, 간질 등 많은 건강 문제에 시달리며 허약해졌고, 우울증에 걸렸다.
-허약해진 아이다 매킨리는 영부인으로써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열릴 때면 손님들과 악수를 하는 대신 향기로운 꽃다발을 살짝 드는 것으로 대신했고, 관례와 달리 남편 바로 옆자리에 앉아 윌리엄 매킨리는 아내가 발작이 올까 예의 주시했다.
-아내가 발작의 징후가 보이면 윌리엄 매킨리는 아내의 얼굴을 큰 손수건으로 잠시 가려 그를 진정시켰다.. 이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1901년 암살자에 총을 맞은 윌리엄 매킨리는 죽는 순간조차 아내를 걱정하며, 옆에 있던 비서에게 이 일을 아내에게 어떻게 말할지 조심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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