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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않은 그레이스 켈리의 이야기들 TMI

Royals/Europe

by lxiawr 2021. 3. 31.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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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흥미로운 인생을 산 인물이기에 관심이 가는 그레이스 켈리
tmi 글에도 그레이스 켈리 이야기들을 넣었지만 추가하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따로 포스팅합니다☆ミ

 

 

 

 

 

 

 

그레이스 켈리의 부친, 존 B. 켈리 시니어는 그의 부친을 따라 벽돌 관련 사업을 물려받는 동시에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 조정 선수로 출전해 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4년 뒤에는 파리 올림픽에서 또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이 당시 한 매체가 그에게 달아준 타이틀은 가장 완벽한 체격의 미국 남성(The Most Perfectly Formed American Male)이었다.

 

 

 

kelly for brickwork

 

 

 

 

 

 

 

 

 

모친&막내여동생 엘리자베스&그레이스

 

 

 

모친 마가렛 켈리는 수영선수로 활동했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최초의 여성 체육 강사였다. 

 

 

 

 

 

 

 

 

 

막내 여동생 리즈앤&아버지&그레이스

 

 

 

존 B. 켈리 시니어 마가렛 켈리는 체육계에 열렬히 몸담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켈리 가문에게 성공이라 하는 것은 스포츠계에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수줍어하며, 무대 서기를 좋아하는 자식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특히나 그레이스 켈리는 어릴 적 천식과 호흡계 문제를 앓으면서 부모의 눈에 전혀 차지 않았다.

 

 

 

 

 

 

 

 

 

켈리네

 

 

 

특히나 그레이스 켈리의 부모는 자수성가하며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적이긴 하였으나, 부친은 밥먹듯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며 배우가 꿈인 딸을 공개적으로 비웃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고 모친은 지금으로 따지면 아동학대로 잡혀 들어갈 만한 신체적 폭행을 자식들에게 주저 없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말 신기한 게 그레이스 켈리는 최소 십몇 년 연상의 남자들과의 관계(만) 갖었는데 이게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존 켈리 시니어와 주니어

 

 

 

존 B. 켈리 시니어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부모의 10명의 자식 중 한 명이었다. 본인이 배우라는 직업을 비하한 것으로는 별개로 형제들 중 2명은 할리우드(브로드웨이)에서 유명한 인물들이다. 그중 한 명은 조지 켈리로 연극 각본으로 퓰리쳐 상을 수상한 작가로 1920년대에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나머지 한 명은 월터 켈리. 흑인 차별이 만연했던 그 당시에도 유별나게 흑인 차별자로 유명했던 코미디언이었다. 후에 월터 켈리는 할리우드에서 처참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존 B. 켈리 시니어가 최소 몇백억 대(?) 자산가로 자수성가를 할 수 있었던 벽돌 사업은 조지 켈리월터 켈리에게 그 당시 7천 달러를 빌려서였다. 그러나 조지 켈리는 커밍아웃하지 않은 동성애자로 유명했고 그래서 결국 켈리 패밀리에게 손절당한다. 하지만 그레이스 켈리조지 켈리를 모나코에 초대하는 등의 서로 왕래를 하며 지냈다.

 

 

 

 

 

 

 

 

 

 

 

 

 

그레이스 켈리는 1남 3녀 중 두 번째 딸로 부모에게 첫째 언니에게 비교받고, 막내 여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기는 중간에 낀 자녀였는데 특히나 부친은 첫째 딸인 마가렛(애칭 페기)을 편애했다. 그레이스 켈리가 <컨트리 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한 기자가 "딸 자랑스러우시죠ㅎㅎㅎ"라고 질문하자 "그레이스가 할 수 있는 건 페기는 더 잘할 수 있소(Anything that Grace could do, Peggy could always do better)" 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엘리자베스의 결혼식때, 들러리로 선 그레이스&마가렛

 

 

 

 

 

 

마가렛&그레이스&엘리자베스

 

 

 

 

마가렛&엘리자베스&그레이스와 카롤린

 

 

 

 

 

 

 

 

 

 

주니어와 그레이스

 

 

 

그레이스 켈리의 유일한 오빠인 존 B. 켈리 주니어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조정선수로 출전해 동메달을 수상했다. 이 메달은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식 선물로써 주었다고 한다. 후에 존 켈리 주니어는 메달이 다른 색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자조했다.

 

 

 

 

 

 

 

 

 

50년대 초반, 뉴욕에서 그레이스 켈리

 

 

 

그레이스 켈리는 필라델피아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 당시 명문 사립 여자대학교였던 베닝턴 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수학시험에 낙제했다. 결국 그레이스는 대학 입학을 포기한 채, 브로드웨이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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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페기&그레이스

 

 

 

위에서 언급했듯이, 켈리의 부친은 눈에 띄일정도로 첫째 딸 페기를 편애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기는 켈리네 자녀 중에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가장 실패한 듯 보인다.

 

실상이야 어찌 됐든 존 켈리 주니어는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에, 가족이 가장 성공하지 못할 인물이라고 여겼던 딸은 할리우드 대스타에 한 나라에 공주까지 됐고, 막내딸은 일찍이 결혼해 해로한다. 하지만 페기는 두 번 결혼했지만 두 번 모두 이혼으로 끝났다. 심지어 첫 번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 딸들 중 한 명은 15살이 되자마자 집에서 가출해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페기는 알코올에 의존하며 1991년 사망했다.

 

 

 

 

 

 

 

 

 

페기&그레이스&모친

 

 

 

모친 마가렛 켈리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990년 사망할 때까지 반 식물인간 상태로에 빠져있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사이 1982년에는 딸 그레이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3년 후에는 유일한 아들 존 켈리 주니어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존 켈리 주니어의 장례식에는 레니에 3세를 비롯한 그레이스 켈리의 세 자녀 모두 참석했다). 마가렛 켈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전혀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첫째 딸은 그다음 해에 사망했고, 유일하게 막내딸 엘리자베스만이 2000년대 이후까지 순탄한 삶을 살았다.

 

 

 

 

 

 

 

 

올레그 카시니와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의 레니에 2세와 약혼할 당시 이미 한 남자와 약혼한 상태였다. 바로 패션 디자이너 올레그 카시니(Oleg Cassini). 올레그 카시니는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Grace kelly Look'을 만들어냈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마가렛 켈리는 유럽 출신의 이미 두 번에나 이혼했던 남자를 반길리 없었고 모친의 극심한 반대로 그레이스 켈리는 패션 디자이너를 떠나 왕자와 결혼한다. 후에 그레이스 켈리는 만약 그와 결혼했다면 얼마나 많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으며 인생이 바뀔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그와의 파혼을 후회하는 어구의 발언을 했다. 나중에 올레그 카시니는 "우린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하기 위해 약혼을 했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라며 자서전에 언급했다. 

 

 

 

올레그 카시니는 재클린 케네디의 영부인 시절 재키 스타일을 만들어낸 패션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레니에 2세와의 약혼 후 올레그 카시니는 그레이스 켈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이 남자와 결혼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이 결혼이 당신이 받아볼 대본 중에 가장 잘 쓰인 것이기 때문이야. 당신은 이제 앞으로 몇 년 간 동안 여주인공일 테니 (One of the reasons I believe you're marrying this man is because this is the best script that you ever received in your life. You will be a star for years to come)"

 

 

 

 

 

 

 

 

약혼발표때 그레이스 켈리&레니에 2세

 

 

 

 

 

 

사실 그레이스 켈리는 결혼 후에도 배우 은퇴를 할 생각이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레니에 2세와 약혼 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좋은 역할을 고르기 위해 수많은 대본을 보고 있고, 연기를 그만 둘 생각은 없다(I'm never going to stop acting)라 밝혔었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 며칠 후 레니에 2세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 아내가 일을 하길 원치 않는다. 이러한 우리의 결정에 만족한다" 라고 그레이스 켈리의 배우 은퇴를 알렸다.

 

 

 

 

 

 

 

 

 

 

 

 

레니에 2세는 아내가 배우로서 활동하는 것을 굉장히 반대했는데 그중 하나로 둘의 결혼 후 모나코 내에서 아내 그레이스 켈리의 영화의 상영을 모두 금지해버린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1962년 알프레드 히치콕은 새 영화 <Marnie>의 여자 주인공으로 그레이스 켈리가 출연한다는 것을 발표했지만 결국 몇 달 후 모나코에서 그럴 일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후 영화 메이킹에서 히치콕 감독은 모나코의 보수적인 부류들이 그레이스 켈리의 배우 활동을 막았다 발언했다.

 

 

 

 

 

[그레이스 켈리 外] 알면 좋고 몰라도 상관없는 흥미로운 TMI (고전 할리우드 배우 ver.) (내용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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