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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로열패밀리, 잊혀져야만 했던 딸

Culture/Features

by lxiawr 2022. 8. 2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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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가문의 기반을 쌓은 조세프 케네디와 아들들

 

 

케네디, 현대 사회를 살면서 이 가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말할 순 없습니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던 조세프 케네디 시니어는 주식, 위스키, 할리우드···로 막대한 부를 쌓아 지금의 케네디 가문의 기반을 쌓아 올렸습니다. 돈 굴리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조세프 케네디 시니어는 '검은 화요일' 라 불리는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 때 공매도를 쳐 어느 때보다도 돈을 벌었죠.

 

 

케네디 부부와 8명의 자녀들, 장남은 사진 속 없다.

 

 

케네디가의 저주, 누구보다도 정치적 야망 가지고 있었던 조세프 케네디는 9명의 자녀들을 경쟁적으로 훈련시켰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대통령까지 만들지만 20세기 내내 케네디 가문에게는 비극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JFK의 바람기는 아빠에게서 물려왔나보다, 바람기로 유명했던 조세프 케네디 시니어는 20년대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배우 글로리아 스완슨과의 불륜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내로부터 성적인 만족을 얻지 못한 조세프 케네디는 여러 배우들과 불륜을 갖었고, 아내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묵과해 결혼생활을 이어감으로써 얻는 이득을 취득했다. 30년대 후반, 케네디 시니어와 불륜 관계를 갖은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딸은 엄마의 불륜남의 딸, 로즈메리 케네디와 친밀한 친구사이였다.

 

 

조세프 케네디가 언젠간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장남, 조 케네디 주니어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조종사로 복무하다 사망, 딸 캐슬린 또한 연인과 함께 비행기를 타다 추락사고로 사망했고요.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1963년 텍사스에서 암살당하며 뒤 이어 형 아래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바비 케네디 또한 선거운동 도중 총 맞아 암살당합니다. 

 

 

JFK(왼쪽) 조 케네디 시니어(오른쪽)

 

 

후에는 90년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존 F. 케네디의 유일한 아들 또한 아내와 함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비극적인 사건들이 이어진 케네디 가문은 미국의 로열패밀리로 상징되지만 그중 조세프 케네디의 첫 번째 딸, 로즈메리 케네디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1961년, JFK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케네디 가족들

 

 

케네디가의 장녀 로즈메리 케네디는 평생 대중들의 눈을 피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1918년 9월 13일 금요일 케네디가의 고향, 매사추세츠의 브루클라인에서 태어난 로즈메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난했죠.

 

 

오빠들과 신생아 시절 로즈메리 케네디

 

 

로즈 피츠제럴드 Rose Fitzgerald는 딸이 곧 나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늦는 의사 때문에 출산을 불가피하게 늦춰야 했습니다... 딸의 머리는 이미 나왔는데도 말이죠! 조산사는 의사가 도착할 때까지 출산을 막으라 지시를 받아 머리가 나온 로즈메리를 다시 로즈 피츠제럴드의 자궁 속으로 밀어 넣었고, 장장 2시간 동안 다리가 벌린 채로 고정시켜버립니다.

 

 

성찬식을 위해 차려입은 로즈메리.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 부부..그들이 다니던 가톨릭 교회에서 로즈메리가 지적 장애를 가진 것을 알았다면 로즈메리가 성찬식을 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고통스러운 분만을 거치며 태어난 로즈메리는 다른 형제들보다 기어 다니고, 서고, 걷고, 말하고... 모든 성장과정에서 뒤처지자 부모는 로즈메리의 지적 장애를 발견하게 됩니다. 전문가들은 로즈메리의 결함은 태어나면서 산소부족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죠.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지적 장애에 대한 연구는 발전되지 않았고, 낙후된 교육과 치료방법은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나쁜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오명을 받았습니다.

 

조세프 케네디 시니어와 로즈 케네디는 그들의 모든 자녀들에게 높은 기대를 거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건 지적 장애가 있는 로즈메리도 제외는 아녔습니다. 케네디 부모는 로즈메리와 다른 자녀들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며 지적 장애가 있는 딸이 전문적인 교육과 실험적인 주사를 통해 '치료' 되길 바랬죠.

 

 

어린 로즈메리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로즈메리는 10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더 커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숨겨져야 했던 로즈메리에게 적절한 교육과 보살핌을 받기란 힘들었고, 부모는 로즈메리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 사립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렇게 보내진 몇몇 학교들은 로즈메리가 필요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는 했으나 지적장애가 있는 로즈메리에게 잦은 변화는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었죠.

 

 

10대 후반의 로즈메리

 

 

그래도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로즈메리는 비록 지적 장애로 배움이 늦어 학년을 반복해서 다녀야 했지만 애정 많고, 따듯한 마음씨를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였습니다. 오빠 조 케네디 주니어와 신나게 춤을 추러 나가거나.. 그러나 장애를 가진 여동생에게 연민을 보여준 오빠의 속마음은 어땠을까요?

 

 

조 케네디 주니어

 

 

30년대 독일로 여행을 떠난 조 케네디 주니어는 당시 부친에게 보내는 편지에 "(히틀러는) 제가 생각할 때 아주 훌륭한 단종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단종법은 이 지구에 사는 역겨운 사람 표본들을 없앨 것입니다." 이에 장남의 편지를 받은 부친 또한 "너의 결론이 매우 타당한 듯 하구나" 라며 동의하는 반응을 보냈죠.

 

단종법: 우생학적 입장에서 유전성 지적 장애인 등의 생식(生殖) 능력을 없애는 일에 대하여 규정한 법률. 미국에서 최초로 입법화되었고 그 후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서도 제정되었다.

 

 

케네디 가족

 

 

존과 로즈메리

 

 

20세기 초반, 많은 부유하고, 높은 교육을 받은 일명 '금수저' '엘리트' 들은 우생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유색인종, 이민자, 가난한 사람, 장애인들과 같은 '나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녀를 낳거나 후손을 남기는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죠.

 

특히나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 부부에게 지적 장애를 가진 딸은 그들이 생각하던 '나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딸이었고, 케네디가의 명성을 더럽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세프 케네디 시니어는 가족의 더러운 비밀을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로즈메리 또한 부모의 실망스러운 반응을 알고 있었고, 또한 절망했죠.

 

 

 

 

10대 시절 로즈메리가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아빠를 행복하게만 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이든 하겠어요! 아빠를 실망시키는 건 싫어요. 절 보러 와 주세요. 저는 매일 매우 외로워요.."

 

 

영국에 도착한 케네디 자매, 유니스(왼쪽) 로즈메리(오른쪽)

 

 

JFK와 여동생들

 

 

로즈메리는 조세프 케네디가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의해 1938년 영국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된 뒤 영국에 잠시 살았을 때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어요. 10대 후반의 사랑스러운 소녀였던 로즈메리는 영국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동생 Kathleen과 데뷔탕트에 입성하며 당시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와 만남을 가지기도 했어요. 

 

 

버킹엄 궁에서 로즈메리

 

 

캐슬린 케네디(왼쪽)는 제10대 데본셔 공작의 후계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 가문은 개신교 공작 아들을 반대했고, 큰오빠를 아무도 제외하고 아무도 캐슬린 케네디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캐슬린은 새로운 연인을 갖었고, 남편은 전쟁 중 사망했다. 연인과 결혼하려 하자 케네디 가족들은 용납하지 않았는데, 조세프 케네디의 최애딸이었던 캐슬린은 결혼을 승락받으러 아빠를 보러가던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그 후 1963년 JFK는 아일랜드 국빈 방문 도중 여동생의 무덤을 개인적으로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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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상황이 급변하자 케네디 가족들은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삶에 만족스러웠던 로즈메리는 아빠와 함께 영국에 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긴급 공격이 시작되면서 로즈메리는 런던을 떠나 시골에 있는 몬테소리 학교 Belmont House에 보내집니다.

 

몬테소리 학교에서 19살의 로즈메리 케네디는 어느 때보다 안정감과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조세프 케네디 또한 아내, 로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딸이 어느 때보다 좋아 보이며 외롭지 않아 보인다며 행운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죠.

 

 

 

 

그러나 주영 미국 대사 조세프 케네디는 "나치의 공격에서 영국의 민주주의는 끝났다." 라며 영국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거침없는 의견은 대사직 사퇴를 불가피하게 만들었습니다. 1940년 11월 대사직에서 쫓겨난 조세프 케네디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의 정치적 커리어도 망가졌죠. 로즈메리 또한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로즈메리의 미국으로의 귀환은 비참했습니다.

 

 

 

 

자유로운 영국 시골 생활과 달리 규칙적이고 엄격한 생활 속에서 살게 된 로즈메리는 더 반항적으로, 더 변덕스러워졌죠. 폭력적인 발작과 성질을 보이기 시작한 로즈메리는 형제자매들에게 폭력적으로, 심지어 외조부를 갑자기 발로 차며 때리기 시작했고 끌려갈 때까지 할아버지를 구타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후 엄격한 수녀원 학교에 갇혀 엄격한 통제 속에서 살게 된 로즈메리는 학교에서 도망쳐 새벽 2시에 워싱턴 D.C.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등 케네디 부부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었죠. 

 

 

 

 

새벽 술집에서 자신에게 관심과 위안을 주는 남자들을 찾아다니는 로즈메리는 정치적 야망이 대단하던 조세프 케네디에게는 큰 당혹감이었습니다. 반항적인 딸의 행동에 케네디는 자신의 야망뿐만이 아니라 아들들의 커리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 그가 발견한 '해결책'

 

 

 

 

1941년 11월 조세프 케네디는 로즈메리를 2명의 의사에게 데려갑니다. 그가 발견한 '해결책'뇌엽 절제술이었습니다. 당시 뇌엽 절제술은 새로운 정신 외과적 수술로 알코올 중독이나, 동성애, 색정증과 같은 청소년들의 심리적인 비행에 대한 치료 수술로 알려졌었습니다. 

 

 

로즈메리 케네디의 뇌엽절제술을 실시한 Dr. 월터 프리먼

 

 

대부분 뇌엽 절제술은 우울증과 공격성을 없애기 위해 시행됐으나 당시에도 뇌엽 절제술은 매우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으며 수술 후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죠. 미국 의학 협회는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때까지 뇌엽 절제술을 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했으나... 조세프 케네디는 아내, 가족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딸의 두개골을 뚫는 수술을 받게 합니다.

 

 

뇌엽절제술의 장점을 광고한 전후사진, 역사상 뇌엽 절제술만큼 많은 논란을 불어일으킨 의료수술은 없다. 뇌엽 절제술의 80%는 젊은 여성에서 실시됐다.

 

 

23살에 뇌엽 절제술을 받게 된 로즈메리, 사실 로즈메리 케네디뿐만 아니라 1940년대만 해도 뇌엽 절제술은 미국의 수많은 젊은 여성들에게 시행됐습니다. 로즈메리의 뇌엽 절제술을 실시한 닥터 월터 프리먼만 해도 3,000명 이상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었다알려져요.

 

그렇게 실시된 뇌엽 절제술은... 절망적일 정도로 대실패로 끝납니다. 수술 직후 로즈메리의 수술은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수술에 들어간 간호사는 수술 후의 로즈메리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아 곧바로 병원을 관두기도합니다.

 

 

정신외과의사 월터 프리먼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뇌엽 절제술을 시행하며 전파했다. 현재, 뇌엽 절제술은 더이상 시행되지 않는다. 월터 프리먼은 1967년 Helen Mortenson이라는 주부가 3번의 뇌엽절제술을 받고 뇌출혈로 사망, 그 후 100명의 환자들이 연이어 죽자 결국, 월터 프리먼의 커리어 또한 죽었다. 월터 프리먼의 악행은 야만적이면서도 잔인하다. 50년대 월터 프리먼은 뇌엽 절제술을 하던 중 홍보 사진을 찍기 위해 갑자기 포즈를 취하면서 수술 기구가 환자의 뇌에 너무 깊이 들어가 환자를 사망시켰다. 심지어 프리먼은 수술용 마스크나 장갑도 착용하지 않았다.

 

 

딸의 비행적인 행동을 고치기 위해 시행한 뇌엽 절제술은 딸을 제대로 걷지도, 말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자신의 고집으로 하게 된 수술로 2살 정신 상태로 퇴보한 로즈메리를 보기 위해 온 조세프 케네디는 다른 가족들이 절대 로즈메리를 보지 못하게 금지했습니다. 혼란스러운 가족들에게 케네디는 로즈메리는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만 가족에게 말할 뿐 수술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죠.

 

 

JFK와 부친

 

 

with. 바비 케네디

 

 

아내에게는 로즈메리가 시설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딸을 방문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고, 부부는 딸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로즈메리는 다른 사회봉사를 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설명했죠. 수술 직후 시설에 갇힌 로즈메리는 그 누구도 없이 혼자서 지내야 했습니다. 

 

40년대 후반이 되고 JFK가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자 케네디 시니어는 딸이 아들의 앞길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위스콘신에 있는 St. Coletta School로 옮겨버립니다... 그렇게 남은 여생을 이곳에서 살게 되죠.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보며 행복해하는 케네디 부부..

 

 

조세프 케네디의 입막음은 20년 넘게 아무도 로즈메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60년대 초반 뇌졸중이 온 케네디 시니어는 자녀들에게 로즈메리의 행방에 대해 알려주며 수술에 대해 알게 된 JFK는 1958년 로즈메리를 몰래 찾아가 동생의 상태를 알게 됩니다.

 

 

50년대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자녀들의 부모들이 설립한 National Association For Retarded Children을 위해 연설하는 케네디 대통령, 현재는 Arc of the United States로 불린다.

 

 

그 후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미국 대통령 최초로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연구와 프로그램 개선을 위한 자금 지원하는 법안을 제정합니다.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든 케네디 시니어는 뇌졸중을 온 후 실어증을 앓고,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다 1969년 사망하고, 드디어 로즈메리는 70년대부터 남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1963년, 조세프 케네디 시니어

 

 

남은 케네디 형제자매들인 테드, 유니스,, 패트리샤는 로즈메리를 방문하며 로즈메리는 조카들과도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이때도 로즈메리의 존재 자체는 비밀로 남았습니다. 

 

 

말년에 조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로즈메리..JFK 주니어(왼쪽), 그의 아내 캐롤라인 베셋(오른쪽)

 

 

조카들..마리아 슈라이버(오른쪽 상단)

 

 

 

 

 

 

 

로즈메리와 가장 친밀하게 지낸 유니스 슈라이버 Eunice Shriver는 로즈메리에게 영감을 받아 1968년 지적 발달 장애가 있는 선수들이 참가하는 국제 스포츠 대회 Special Olympics를 설립했습니다. 지금까지 매년 4년마다 열리고 있는 스페셜 올림픽은 오는 2023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이기도 하고요.

 

동생 진 케네디 스미스도 로즈메리에 영향을 받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Very Special Arts 단체를 설립해 로즈메리를 기리고 있어요. 

 

 

Special Olympics의 참가한 선수에게 메달을 걸어주는 유니스 슈라이버

 

 

 

 

부친의 고집으로 인해 23세라는 나이에 뇌엽 절제술을 받은 로즈메리는 2살의 정신상태로 56년간 고통받으며 2005년 1월 7일 86세라는 나이에 사망합니다. 케네디가의 잊혀진 존재인 로즈메리 케네디가 할리우드에서 조명될까요? 

 

 

로즈메리를 연기할 엘리자베스 모스?

 

 

엘리자베스 모스가 로즈메리 케네디로 캐스팅된 영화 <A Letter From Rosemary Kennedy>가 제작된다는 소식이 2018년 들려왔지만 그 이후 영화 관련 소식은 전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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