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군주의 장남 후계자가 수여받는 웨일스 공의 아내는 일반적으로 웨일스 공비라는 타이틀을 받게 됩니다. 사실 웨일스 공비라는 타이틀은 자체적으로 수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웨일스 공의 아내라는 조건이 있어야 해요.
영국 왕위 남성 계승자의 아내가 Princess of Wales가 되기 전에도 웨일스 공주는 분명히 있었지만 웨일스 왕자의 아내가 Tywysoges Cymru란 타이틀을 쓴 것은 단 한 명에 불과해요. 그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부터 시작된 웨일스 공의 전통에 따라 14세기부터 존재해왔던 역대 웨일스 공비는 누가 있었을까요?
조안의 켄트 1361-1376
죽은 지 150년이 지나서야 전쟁에서 보인 잔혹함이란 명성으로 흑태자라 불린 우드스톡의 에드워드의 아내였던 켄트의 조안은 영국 왕실 최초의 웨일스 공비였습니다.
불과 13살 때 웨일스 공으로 임명된 우드스톡의 에드워드는 현재까지 영국 제국관에 남아있는 루비를 영국에 가져왔지만 왕위에 오르기 전 1376년 에드워드 3세보다 1년 일찍 사망하게 됩니다. 둘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켄트의 조안은 Dowager Princess of Wales로 불리게 됩니다.
앤 네빌 1470-1471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의 외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1470년 결혼한 앤 네빌.. 그러나 14살이라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실제로 결혼이 이뤄졌는지는 의문이긴 합니다. 더욱이나 다음 해 랭커스터의 에드워드는 요크 가문 vs. 랭커스터 가문 장미 전쟁의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처참하게 사망했기 때문에 앤 네빌은 웨일스 공비란 타이틀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만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첫번째 남편이 죽은 후 앤 네빌은 1972년 글로스터 공작과 재혼하게 됩니다.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며 어린 조카 에드워드의 섭정을 맡게 된 글로스터 공작은 조카를 밀어내고 본인 스스로 리처드 3세가 돼죠. 그러나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비가 된 앤 네빌은 새로운 지위를 1년도 누리지 못한 채 결핵으로 인해 28세 나이에 사망합니다.
아라곤의 캐서린 1501-1502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결혼은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공고한 결합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의 장남인 아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콘월 공작으로 임명되며 3살에 웨일스 공으로 임명됐죠. 1501년 11살이던 아라곤의 캐서린은 아서와 결혼했으나 웨일스 공은 갑작스럽게 발한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라곤의 캐서린은 단호하게 아서와 결혼식 후 성관계를 맺지 않았다 맹세해 아서의 남동생 헨리 튜더와 결혼할 수 있었죠. 그러나...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1714-1727
잉글랜드의 앤 여왕이 자식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 법에 따라 제임스 1세의 손녀의 아들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에게 돌아갑니다. 그는 잉글랜드에 오기를 싫어했다고는 하나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는 잉글랜드 하노버 왕조의 초대 국왕 조지 1세로서 아들 가족과 신하들을 이끌고 와 오늘날 영국 왕실로 이어지고 있어요.
조지 1세와 조피아 도로테아의 아들, 조지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하며 웨일스 공비가 된 안스바흐의 카롤리네..안스바흐의 카롤리네는 아라곤의 캐서린 이후 2세기 만에 다시 등장한 웨일스 공비이기도 합니다.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1736-1751
조지 2세와 안스바흐의 카롤리네의 장남, 프레데릭과 결혼해 웨일스 공비가 된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웨일스 공은 왕위에 오르기 전 1751년 조지 2세보다 먼저 사망합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 1795-1820
조지 3세와 샬롯 왕비의 장남, 조지 아우구스투스 프레데릭과 1795년 결혼해 웨일스 공비가 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
조지 4세가 된 남편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의 결혼 생활은 그에게는 불행 그 자체였습니다. 일단, 조지 4세는 비밀리에 결혼한 아내가 이미 존재했죠.
하지만 조지 3세는 자식들이 로마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로마 가톨릭 신자와 결혼한다면 왕위 계승권이 박탈당할 수 있음에도 로마 가톨릭 집안의 마리아 앤 피처버트와 결혼했으나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조지 4세는 사랑하지 않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를 격렬하게 혐오했죠. 조지 4세는 이혼하고 싶었으나 샬롯 공주를 낳은 후 곧바로 둘은 별거합니다. 조지 4세는 본인은 수많은 사생아를 낳았음에도 1806년 아내가 사생아를 낳았다며 비난해 카롤리네 왕비는 의회의 조사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결과는 혐의 없음
아내를 정말로 혐오했던 조지 4세는 1820년 조지 3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다시 한번 아내의 간통죄를 물어 재판에 회부하게 만들었죠. 대중들은 왕비를 지지했으나 결국 조지 4세는 아내를 대관식에 못 오게 막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조지 4세의 20년 동안 지속된 공개적인 아내 혐오는 영국 왕실의 인기 하락을 초래했습니다.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1863 - 1901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와 루이제 폰 헤센카셀의 첫 번째 딸, 알렉산드라는 1863년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알버트 에드워드와 결혼하며 웨일스 공비가 됐습니다. 유럽의 할머니라 불리는 빅토리아 여왕과 비슷하게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는 '유럽의 장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어요.
알렉산드라 왕비는 류머티즘열로 인해 20대 초반부터 절뚝거렸어요. 초반에는 '알렉산드라 절뚝거림'이라며 사교계 여성들 사이에 유행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연이어 낳은 알렉산드라 왕비는 거의 청각장애인에 가까울 정도로 난청에 시달렸죠. 덤으로 남편에 멈추지 않는 바람기는 왕비의 고통을 더하기만 했습니다.
50년 동안 웨일스 공으로 남았던 찰스 3세 이전 가장 긴 기간 동안 웨일스 공이었던 에드워드 7세의 아내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36년 동안 웨일스 공비였습니다.
테크의 메리 1901-1910
조지 3세의 손녀 케임브리지 공녀 메리 아델라이드와 테크 공작의 딸 테크의 메리는 딱히 예쁜 얼굴도 아니었고, 재산은 커녕 오히려 무일푼에 가까웠지만 그의 매력과 카리스마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며느리 오디션에 합격하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의 장남, 알버트 빅터는 왕자라는 지위를 제외한다면 딱히 매력적이지도, 카리스마가 있지도 않은 수준 떨어지는 결혼상태였죠.
알렉산드라 왕비에게 물려받은 청각장애까지 앓던 알버트 빅터 왕자는 문란한 에드워드 7세와 마찬가지로 사창가를 전전했습니다. 심지어 런던의 한 고급 남성 사창가에 알버트 빅터 왕자의 절친들이 목이 졸린 채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자 왕자가 동성애자라는 루머와 함께 런던 살인마 잭 더 리퍼가 아니냐라는 소문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추잡한 소문들에 영국 왕실은 알버트 빅터 왕자를 빨리 결혼시키는 것이 중요했죠. 1890년 알버트 빅터 왕자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 앨리스 공주의 딸 헤센의 앨릭스에게 프러포즈 하나.. 돌아온 것은 거-절
결국 알버트 빅터 왕자는 빅토리아 여왕의 허락을 받은 테크의 메리와 약혼합니다. 알버트 빅터 왕자와 약혼한 테크의 메리는 약혼을 후회했다고 하나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죠. 테크의 메리에게는 다행? 알버트 빅터는 정말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사실 알렉산드라 왕비에게 물려받은 질병들과 평생 동안 정신질환에 시달렸으니 예견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남은 테크의 메리는 1년 후 약혼자의 남동생과 결혼하며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오른 후 웨일스 공비가 됐습니다.
덧붙이자면.. 사촌 사이인 조지 4세와 니콜라스 2세는 정말 쌍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았습니다. 하지만 메리 왕비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외모도, 성격도 전혀 달랐죠.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니콜라스 2세가 퇴위당하며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 가택연금에 처하자 조지 4세는 그들에게 영국으로 망명할 것을 제의하나, 그 제안은 곧바로 철회됩니다. 사실 이 제안이 유효했었더라도 볼셰비기가 로마노프 가문이 러시아를 떠나는 것을 허락했을지는..
그렇게 니콜라스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르브나와 다섯 명의 딸들은 총살을 당하며 300년의 로마노프 왕조는 피로 끝나게 됩니다. 오랫동안 조지 5세는 사촌들의 망명을 요청하였으나 영국 정부가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최근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오히려 로마노프 가문을 구하지 않은 것은 영국 정부가 아닌 조지 5세였습니다. 사촌의 가족들을 구하려다 자신의 가족들이 위협에 처할까 두려웠던 조지 5세의 결정이었죠.
다이애나 스펜서 1981-1997
에드워드 8세는 웨일스 공 시절 결혼하지 않았고,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엘리자베스 2세와 마가렛 공주밖에 없었으니 70년 만에 새로운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3세와 1996년 이혼했으나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웨일스 공비라는 타이틀은 유지했습니다.
카밀라 파커 보울스 2005-2022
웨일스 공의 아내는 자연스레 웨일스 공비가 되기 때문에 카밀라 파커 보울스도 2005년부터 웨일스 공비가 됐습니다. 다만 다이애나 스펜서가 웨일스 공비로써 받은 대중들의 사랑 때문에 찰스 3세와 결혼 후에도 웨일스 공비라는 타이틀은 사용하지 않고 콘월 공작부인이라는 작위를 사용했죠.
케이트 미들턴 2022~
캐서린 미들턴이지만 일반적으로 케이트 미들턴으로 소개되는 현 웨일스 공비
엘리자베스 2세 사망 후 즉위한 찰스 3세는 그의 첫 대국민 연설에서 윌리엄 왕자는 웨일스 공으로 임명했습니다. 따라 케이트 미들턴은 남편과 동시에 그 칭호를 받은 역사상 세 번째 웨일스 공주가 됐네요.
▼ Ocalla's..
매번 주절주절만 길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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